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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2쪽
심야코인세탁소에 출근한 첫날 오 대리는 할머니에게 물었다.
“할머니, 나 그래도 살아 보겠다고 용쓰는 것 좀 봐. 나 너무 형편없지?”
할머니는 드라마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귤을 까 입에 넣으며 우물우물 말했다.
“그럼. 형펀없지. 근데 세상도 형편없어. 아주 엉망이야. 똥 같아. 그니까 네 맘대로 더 형편없이 굴어도 돼.”
58쪽
송영달뿐 아니라 고독 채널을 시작한 대개의 참가자들이 3인칭을 사용했다. 일기를 쓸 때조차 나로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들,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일수록 전지적 관찰자 시점, 혹은 전지적 모자나 양말, 전지적 형광등 시점으로밖에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라면 오 대리도 잘 알고 있었다. 의도적인 거리 두기라기보다는 실제로 자신과의 친밀도가 그 정도뿐으로 그 이상 자신에 대해 더 알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. 이는 단순한 객관화가 아니었다. 일종의 혐오거나 혐오하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어기제였다. 그러니까 조부장의 말대로 자기혐오에 단련된 사람들, 단련되었으나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사람들이 고독사 워크숍 같은 걸 신청하는 거였다.
62쪽
- 이럴 때일수록 탈모를 조심해야 합니다. 명심하세요. 고독사는 슬프죠. 아주 슬퍼요. 그러나 대머리와 고독사가 결합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. 당신이 대머리로 고독사하는 한 고독의 이유가 무어건 당신의 고독사 원인은 오로지 대머리가 될 겁니다.
144쪽
애초에 고독사 워크숍이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, 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기를 선택하는 것, 쌓는 것이 아니라 무너뜨리는 것,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두는 것과 관계있었다.
182쪽
부끄러움이 많은 부 감독에게 필요한 건 다만 완전히 잊히는 일이었을 것이다. 첫 작품이 성공했고 그게 끝이었다. 애매한 명성, 모른 척하기에 첫 영광은 너무 컸고 그다음은 너무 처참했다. 익명이 될 수도 없는 어설픈 명성이 그를 점점 더 부끄럽게 했다. 그를 부끄러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건 고독사뿐이었을지도 모른다. 그러나 그는 고독하게 죽지도 못하는 운명이었다. 아니 고독하게 죽었으니 진짜 고독사는 그가 죽은 후에 찾아왔다. 이상한 깃발과 구호와 때늦은 소란스러운 자기 연민과 함께.
292쪽
마르탱이 알려 준 것 중 가장 좋은 것은 혐오하는 힘이었다. 외부의 어떤 것을 혐오하는 것을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쉬웠고 더 강력했다.
- 혐오가 유행이야.
마르탱이 말했다.
- 너도 누군가나 무언가나 어떤 것을 혐오해야 해. 아무것도 혐오하지 않는 사람은 배덕자야. 배척당하게 될 거야.
- 누구로부터? 무엇으로부터?
- 모든 것으로부터. 네가 아닌 모든 것. 어쩌면 너 자신에게도. 정체성이나 취향이나 색을 가지기 위해서는 우선 혐오하는 힘을 길러야 해. 아무도 혐오하지 않는 건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야.
376쪽
오 부장으로 출근하는 첫날, 오 부장은 할머니께 물었다.
할머니, 나 계쏙 이렇게 형편없이 살아도 될까?
할머니는 말했다.
당연하지. 세상이 왜 이렇게 형편없는 줄 알아? 형편없는 사람들만 살아남았기 때문이야. 그러니ᄁᆞ 너도 형편없이 살아. 그러다가 가끔 근사한 일 한 번씩만 하면 돼. 계속 형편없는 일만 하면 자신에게도 형편없이 굴게 되니까. 근사한 일 한 번에 형편없는 일 아홉 개. 그 정도면 출분해. 살아 있는 거 자체가 죽여주게 근사한 거니까. 근사한 일은 그걸로 충분히 했으니까 나머지는 형편없는 일로 수두룩 빽빽하게 채워도 괜찮다고.
뭐야, 할머니. 혼자 근사한 척은.
오 부장은 괜히 투덜대며 텅 빈 방을 둘러보았다. 할머니는 이제 없다. 하지만 할머니라면 그렇게 대답해 줄 것을 오 부장은 알고 있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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